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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모리 시게코(SASAMORI Shigeko) 
성별 여성  피폭 시 연령 13세 
촬영일 2012년10월19일  촬영 당시 연령 80세 
피폭지 히로시마(직접피폭 원폭 낙하 중심지와의 거리:1.5km) 
피폭 장소 히로시마시 히라츠카쵸[현재의히로시마시 나카구] 
피폭 시 직업 등 학생 
피폭 시 소속 히로시마 여자상업학교 
소속관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 
한국어 녹음/자막 자막 

사사모리 시게코 씨. 당시 13세. 폭심지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히라츠카쵸에서 피폭. 얼굴은 화상을 입어 크게 부풀어 올랐고 탄 토스트처럼 검고 거칠거칠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모금으로 일미 양국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전쟁을 없애기 위해 모두가 서로 돕겠다는 마음가짐으로, 협력하고, 용기를 갖고 행동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피폭 전의 생활】
제가 철이 들 무렵부터 일중전쟁 중이었고 계속 전시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은 국민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입니다. 처음에는 물자가 풍부했지만 점점 식품과 옷 등 여러 물품이 배급제로 되었고 전쟁이 끝나기 바로 전에는 식품도 부족해졌습니다. 끓는 물에 무잎과 무, 쌀을 조금 넣은 듯한 음식을 줄서서 그릇에 받아오든가, 이러한 배급제도 적어져서, 집에서는 그다지 많이 먹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옷도 역시 배급제가 되어 동네에서 나누어 가진다든지 매우 힘들었습니다.
 
【8월 6일】
원폭이 떨어졌을 당시 여학교 1년생이었습니다. 그날은 마침 처음으로 ‘학도동원’으로써 '건물소개' 뒤처리를 하기 위해 나가 있었습니다. 첫날로 막 이제부터 작업을 하려고 생각했을 때에 비행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날은 정말로 깨끗한 파란색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로, 비행기가 은빛으로 반짝거렸고 흰 비행기 구름이 매우 아름다웠습니다. 옆에 마침 클래스메이트가 있었기에 그 아이에게 “저것 봐, 아름다워.”라고 제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 순간, 비행기에서 흰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과 거의 동시에 굉장히 강력한 압력이라고 할까, 폭풍에 밀려 넘어질 듯이 뒤로 이렇게 쓰러질 때까지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주변이 새카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단지 주위가 캄캄한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동안 그 상태로 앉아 있었더니 짙은 안개가 점점 걷히더니 어슴푸레한 초저녁 같은 느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해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었고, 사람이 이렇게 걸어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온통 피투성이로 머리에는 재를 뒤집어쓰고 있어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화상을 입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 했습니다. 물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자신의 통증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단지 그 많은 사람들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의 뒤를 따라 츠루미바시에서 가까운 강변으로 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강변에 앉아 있던지 그리고 쓰러져 있어서 강은 이미 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체와 물에 들어가 있는 사람, 그리고 물에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피부가 벗겨진 사람도 있었고 피투성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몸이었습니다. 갓난아기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아기 엄마가 화상을 입어 피부가 핑크색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알아채지 못했지만 갓난아기도 화상을 입어 피투성이였습니다. 아기 엄마가 애써 젖을 먹이려고 해도 아기는 울어대기만 했었습니다.
 
【구호소에서】
“강 건너편으로 가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서 어른들이 줄지어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저도 그 뒤를 따라서 다리를 건너서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그곳은 단바라였습니다. 단바라 국민학교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군인들과 다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여기에 오면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학교 교정에는 큰 나무가 있었습니다. 그 나무 밑에 앉아 뒤로 쓰러진 것은 기억하지만, 그 뒤에 언제 제가 학교 강당에 들어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저를 찾기 위해, 수많은 생선을 늘어놓은 모양으로 다친 사람들이 눕혀져 있는 곳을, 촛불을 들고 제 이름을 부르면서 걷다 보니, 모기가 우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제가 “여기예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 얼굴은 새카맣고 풋볼처럼 크게 부풀어 올라 있었고, 피부는 토스트를 굽고 있는 것을 깜박 잊고 연기가 날 때까지 알아채지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 꺼내보니 표면이 이미 새카맣게 타서 거칠거칠하고 단단한 상태와 같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이 가장 알기 쉬운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에서 가슴까지 전부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도중에도 무엇인가가 덜커덩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를 들고 가던 사람들이 “저쪽에는 아직까지 연기가 나고 있어요.”라고 하자 누군가가 “그 밑에 시체라도 있는 것이 아냐?”라고 말하는 것을 멍하니 듣고 있었던 것은 기억합니다.
 
그리고 다시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의식이 돌아오거나 하는 것을 반복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방안으로 옮겨져 모기장 안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의 간호】
머리카락도 타서 꼬불거리는 것을 집에 돌아가자마자 아버지가 가위로 전부 잘라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보니 머리는 타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보호하고 있어서 이마도 위쪽 반은 화상을 입지 않았습니다. 단발머리여서 귀와 옆얼굴은 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는 원래의 피부입니다. 나머지는 전부 타서 눈썹도 눈도 코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맣게 되어 있었습니다.
 
탄 곳과 타지 않은 곳 사이의 검은 부분을 잡아 전부 잘라서 벗겨내니 밑에 슈크림의 크림과 같이 샛노란 고름이 고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물론 약이 없었으므로 집에 있는 헝겊을 찢어서 식용유를 묻혀서 계속 흘러내리는 고름을 닦아냅니다. 그 일을 한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해주셨습니다. 어머니는 화장실에 갈 때만 모기장 밖을 나갔다고 합니다.  아마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교대로 해 주셨겠지요.
 
정원에서 유리조각에 비쳤을 때 제 얼굴을 처음으로 봤습니다. 본 순간에는 설마 자신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습니다. 왜 이런 것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제 얼굴이라고 깨달았을 때는 뭐라고 할까,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얼음물을 등에 갑자기 들이붓는다면 오싹하는 그런 느낌이겠지요. 충격으로 몸 전체가 오싹 소름이 끼쳤습니다.
 
【켈로이드 수술】
나중에 건강해져 밖에 나갈 수 있게 되어 친구 집에 가던 도중에 좋은 음악이 들려서 봤더니 그것이 히로시마기독교단 나가래카와교회였습니다. 그 음악에 이끌려서 교회 앞까지 갔더니 안에 있던 사람이 “들어오세요.”라고 해서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에게 귀여움을 받으며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였기에 할머니는 항상 저를 절에 데려가 주셨습니다. 모두 노인들이었고 아이는 저밖에 없었습니다. 방석을 안고 가져갔었습니다. 하지만 그 음악에 이끌려서 교회에 가게 되고, 그리고 다니모토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19세에 크리스찬이 되었습니다.
 
목은 수술로 이식했습니다. 켈로이드로 목과 턱이 착 달라붙었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잘라내고 이식했습니다. 배의 피부를 떼어내거나 다리의 피부를 떼어냈습니다. 손도 달라붙어 있었기에 그것은 미국에 가기 전에 도쿄대학병원에서 수술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미국에서만 수술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전에 일반 사람들, 도쿄 사람들의 모금과 히로시마기독교단 나가래카와교회 목사의 보살핌으로 도쿄에 가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노만 카즌즈 씨와의 만남】
도쿄에서 수술을 마치고 돌아왔을 즈음, 노만 카즌즈라는 분이 히로시마에 있는 많은 고아들을 위해 미국에서 ‘정신 양자 (moral adoption program)’사업을 위한 모금활동을 하고 계셨습니다. 모금은 다니모토 목사와 ‘히로시마 피스 센터’에 보내져서 시설 등을 세우는데 쓰여졌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위해서 히로시마에 와 계셨을 때에 저희들과 만나게 되었고 또다시 모금활동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반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이 유명해지기 위해서라든가, 일본의 피폭자를 불러들여 상품화한다든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등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큰 회사에 모금을 부탁하기 위해 갔을 때도 이런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기부해 주지 않는 일도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곤경을 극복하고 노만 카즈즈 씨나 그 외에도 뜻있는 분들이 모여서 모금을 해 주셔서 저희들은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일단 ‘히로시마 프로젝트’가 끝나고 모두 수술이 끝나 돌아가게 되었을 때 노만 카즌즈  씨가 저희들을 한 사람씩 불러서 일본에 돌아가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지 물으셨습니다. 도쿄대학병원에 입원했을 때 상냥한 간호사나 친절한 간호사를 만나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아픈 사람들에게 저런 식으로 친절하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었고 그때부터 간호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것을 다니모토 선생님께 얘기하여 하마마츠병원에 가는 것을 정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노만 카즌즈 씨에게 말했더니 “미국에서 해 보지 않겠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정말로 뭐라고 할까, 천진난만하다고 할까, 바보라고 할까, 생각이 짧다고 할까, 장래 계획이나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단지 카즌즈 씨 일가에 여자아이들이 4명 있어서 자주 놀곤 하였기에 저 애들하고 또 놀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카즌즈 씨에게 “집에 오지 않겠니?”라고 들었을 때는 “돌아가서 양친과 상의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와서 아버지에게 얘기했더니 “우리들이 동시에 같이 죽는다면 물론 여기에 있어라라고 말하겠지만, 그런 상황이 아니니까 네가 결정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단지 미국 사람들에게 친절히 대우받았고 즐거운 추억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럼, 가자.’라고 선뜻 가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는 혈연관계인 가족이 없으면 장기체재허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여행자로 가면 곧 돌아와야 합니다. 직업이나 특별한 일로만 미국에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카즌즈 씨의 양녀로서 가게 되었기에 미국의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말】
제가 가장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소중함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소중한 것은 물론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생명은 어떤 식으로 살아 갈 수 있을까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제가 살아있는 것은 사람들의 사랑 덕분입니다. 말하자면 친절, 애정,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있다면 전쟁도 일어날 리가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역시 사랑입니다.
 
증오가 있기 때문에 전쟁. 여러 가지 욕심이 있기 때문에 전쟁. 하지만 타인을 생각하는 애정이 있다면 전쟁도 싸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 다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이 가장 많은 것이 전쟁입니다.
 
제게는 외동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이를,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호사가 데려왔을 때,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저는 이렇게 맹세했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전쟁에 나가서 사람을 죽이든가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다. 절대로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다.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다.” 라고. 세상을 위해, 타인을 위해 태어났기에 전쟁에 내보내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 부모는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의 자식보다 귀엽고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모두가 지닌다면 전쟁은 없어질 겁니다. 단체가 되어 전쟁반대의 구호를 아무리 외친다고 해도 세계평화는 안 오겠지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전 세계 사람들과 협력하여, 진실로 부모의 마음을 가져 전쟁을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일어서지 않는다면 진정한 세계평화는 오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계평화가 안 오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옵니다. 꼭 와야죠. 그래서 저는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부터 자라나는 여러분들의 세계예요. 나이 먹은 나도 가만있지 못하고 노력하고 있으므로, 여러분도 노력해 주렴.” 하고 저는 학생들과 아이들에게 말합니다. 특히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전쟁이나 원폭으로 고통받는 것은 보고 싶지 않고, 절대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생명. 그 생명, 소중한 생명을 서로 돕는 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도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행동합니다. 하지만 행동하기 위해선 용기도 필요합니다. 용기가 있기 때문에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를 제가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이것은 부탁입니다. 전언이 아니라 부탁입니다.
 
 
번역: 홍현경
번역 감수: 가와무라 유키
번역 코디네이트:  NET-GTAS (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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