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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타 타카시(MORITA Takashi) 
성별 남성  피폭 시 연령 21세 
촬영일 2014년11월6일  촬영 당시 연령 90세 
피폭지 히로시마(직접피폭 원폭 낙하 중심지와의 거리:1.5km) 
피폭 장소 히로시마시 요코가와쵸 1쵸메[현재의히로시마시 니시구] 
피폭 시 직업 등 군인·군소속 
피폭 시 소속 추고쿠 헌병대 사령부 
소속관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 
한국어 녹음/자막 자막 

모리타 타카시 씨. 당시 21세. 폭심지로부터 약1.5킬로미터의 요코가와쵸 1쵸메에서 피폭. 그 순간, 마그네슘을 태운 것 같은 섬광과 폭풍으로 날아갔습니다. '군인아저씨, 원수를 갚아주세요'라 하면서 죽어간 아이들. 그 때는 복수심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참상을 보고 복수는 절대 안된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나중에 평화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평화의 소중함을 호소해 나가겠다고 하십니다.
 
【헌병으로서 히로시마에】
하마마츠의 항공대 정비병으로 입대한 것이 1944년 11월 1일입니다. 그 후 공습이 이어졌습니다. 하마마츠의 항공대도 불타,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비행장이 폭탄을 맞고 군대들의 먹을거리도 없었습니다. 군인들 모두 영양실조가 되어 입원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이 당시 일본의 상황였습니다. 1945년 2월1일에 헌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공습이 심했던 도쿄에서도 헌병학교에서는 삼시 세끼에 밥은 나왔습니다. 딱딱한 보리밥이었어도. 고기와 생선이 안 나온 날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하마마츠와는 달랐지요. 군대의 모순을 느꼈습니다. 헌병학교에서 배속 희망을 물었으니 자기 고향인 히로시마를 지원했고, 그리 배속되었습니다.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가는 열차에서 보는 모든 역들이 공습을 당해 있던 시기입니다. 그런 상태를 보면서 귀향했을 때, 히로시마는 내가 그 전해 11월에 떠날 때 그대로의 모습으로 폭탄이 떨어진 흔적이란 없었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왜 군사도시라 불리는 히로시마에 폭탄이, 소이탄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으니 불안감이 나섰습니다.
 
【피폭의 순간】
그 날, 우리가 있던 곳은 네코야쵸의 코도관이란 건물입니다. 3층에 우리 기숙사가 있었고, 거기를 8시에 나섰습니다. 도바시에서 요코가와행 전차를 타고 베츠인마에란 곳에서 내렸습니다. 그 곳에서 대원 전원이 내려서 정렬하고 요코가와바시를 건너 도로 왼편을 따라 잠시 나아가니 시간이 8시 15분이었습니다. 엄청난 광선에 잇따른 '번쩍 쾅'의 굉음을 모두가 말하지만 저는 그 소리는 듣지 못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광선, 마그네슘을 눈 앞에서 태운 상태, 또 엄청난 압력이라 할까 폭풍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이었던 것은 폭풍이 제 후방에서 불어온 것이였습니다. 물론 모자도 손목시계도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10미터쯤 전방으로 날려진 상태였습니다. 일어서서 뒤돌아보자 앞의 건물이 무너진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허나 저는 그 근처 코쇼마치에 있은 화약고의 폭발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공습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어서서 캄캄해진 걸 보니 그 화약고도 아닌거 같고, 일단 목적지로 가보려고 5,6명으로 나아갔습니다. 왼쪽의 조금 벼랑 비슷한 아랫부분에 민가가 있었습니다. 거기 계신 한 할머니가 '군인 아저씨'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왠 일이세요'라 묻자 '집 안에 며느리랑 손자가 묻혔으니 살려 주세요.'라 들려왔습니다. 같이 도와주자 하여 곧장 가서 구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감사의 말을 받을 무렵, 집에서 불이 나왔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아주머니와 안고있던 아이도 타죽는 상황을 구해준 것이 그날 하루 저의 큰 보람이였습니다. 그 뒤, 산 쪽을 향했으나 모두 전멸 상태로 거기 있던 군인들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히로시마에서 뭐가 일어났는지, 누군가 가서 알아봐 달라'하여 저는 화상을 입고 있었으나 '제가 가겠습니다'고 나섰습니다. 저는 군도를 잡고, 코이마치 산에서 10시 넘어서 시내로 향했습니다.
 
【검은 비, 피폭자의 모습】
뚝뚝 비가 떨어져 왔습니다. 그런데 검은 색이어서 놀랐습니다. 사방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었기에 '미군이 기름을 뿌려 우리를 태워 죽이는거야'라고 하는 부상자도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기름과는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꺼먼 비였습니다. 그 비를 온 몸에 맞았습니다. 다가오는 한 노인을 보고 놀랐습니다. 벌거숭이에 흐느적거리며 걷는, 내가 소위 최초로 본 피폭자의 모습이었습니다. 터벅터벅 와서 픽 쓰러진 다음 '이봐'라 하신 순간에는 이미 죽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뇌리에서 떨어지질 않아요. 벌거숭이에 온 몸의 피부가 늘어져있고 얼굴도 새빨간 이상한 모습입니다. 그것을 봤을 때에는 좀 놀랐지요. 그것이 그날 본 최초의 피폭자 모습입니다. 아이들이 모여들고 '물 좀 주세요' '엄마'라 부르짖는 모습들이 주변을 가득 채웠습니다. '군인아저씨, 원수를 갚아주세요'라 하면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때는 '맡겨둬, 미군을 무찌를 거야'라 답하였습니다. 솔직히 그 때에는 아직 복수심만이었지요. 그러나 그 후, 십 수만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 복수는 절대 해서는 안된다고 느꼈습니다.
 
【미군 포로】
8월 5일 일요일, 니시연병장의 헌병사령부를 가니 1주일 전에 B24란 미군 폭격기가 떨어져, 그 승무원이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들을 저는 8월 5일에 보고 있었습니다. 6일 낮에 니시연병장에 도달했을 때, 6명은 즉사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한 명 살아남은 미군도 반나체였습니다. 타버린 버드나무에 두 손은 뒤로 묶여 몸이 앞뒤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화상을 입은 모습으로 중상이었습니다. 쿠레시에서 들어온 헌병이 식량으로 주먹밥을 가져와 '이걸 먹어'라 건네주었지만 저는 안 먹었습니다. 식량을 갖다준 헌병 중령이 쿠레시로부터 히로시마 중심지까지의 상황을 보고 제게 맨 먼저 했던 말은 '이건 보통 폭탄이 아니야. 원자폭탄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우 공 전하의 구출】
소실된 니시연병장에 있어봤자 소용 없어,네코야쵸의 헌병기동대로 간다는 일행들과 같이 거기를 떠나 아이오바시에 이르렀습니다. 아이오바시에서 한 중학생이 '군인아저씨, 츠네미츠 참모께서 저기 계십니다'라고 합니다. 츠네미네 참모란 제2총군에서 츠네미츠란 이름으로 불리웠으나 조선의 황족인 이우 공 전하였습니다. 헌병은 황족을 보호하는 것이 임무고 반드시 해야될 일입니다. 보좌하고자 아이오바시 서단으로 건너 갔습니다. 다리 곁에 이우 공 전하가 쓰러지고 계셨습니다. 군 사령부로 가기 위해 군마를 타고 타카스의 마에다 별장으로부터 히로시마 시내로 들어오시다가 원자폭탄을 맞고 다리 곁에 계셨습니다. 아이오바시 밑으로 내려가, 마침 하류로 피난 가고있던 배를 불러세워 선상의 부상자들을 모두 다리 주변으로 옮겼습니다. 불쌍했지요. 그들을 상륙 시켜 빈 배에 전하, 헌병중령과 우리 헌병들, 전하를 수호하는 요시나리 중령, 카네코 병장이 탔으나 때마침 밀물이 들어와, 배가 앞으로 나아가질 않았습니다.
 
아이오이바시 주변에서 꾸물거리고 있었지요. 당시 우지나마치에 제국사령부 육군부 선박사령부 부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두 척의 상륙용 주정이 난민구제를 위해 나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척을 다리 밑에서 세웠습니다. 그 배에 전하와 우리들이 옮아타고, 방향을 바꿔 강을 내려갔습니다. 강의 양 기슭에 부상자들이 몰려 있는데, 그 속을 불과 5, 6명만 태운 주정이 나아갑니다. 히로시마현청 주변에는 몇 백, 몇 천명의 부상 입은 학생들, 그들을 돌보고 있던 해군병사가 우리 배를 향해 외친 것을 잊지 못합니다. '배를 여기다 대어 주게. 이리 다친 사람들을 내버려두고 가냐'고 외치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을 본체만체해야만 되는 고통. 그때 배에 실어주었으면 살았던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어려운 상황였습니다. 강변 곳곳에 반쯤 물에 잠긴 많은 가족들이 하천을 내려가는 우리 배에 손을 흔들면서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지요. 이우 전하께서는 우지나의 사령부에 거두어졌습니다. 나는 거기서 헤어졌습니다. 이우 전하는 우지나에서 전신 붕대로 감겨진 다음, 선박사령부 부대에 의해 히로시마 맞은쪽의 니노시마 섬으로 옮겨졌습니다. 하룻밤 수발을 받으신 다음날 돌아가셨습니다. 전하가 승하하셨으니 전하를 모신 요시나리 중령은 자살하였습니다.
 
【육군병원에서 종전을 맞이하다】
저녁 8시에 네코야쵸의 코도관에 돌아갔습니다. 근처의 화상 입은 피폭자들이 많이 몰려 있었습니다. 일반인 피폭자들로 제 방에도 못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밤새 치료에 임하고 새벽녘에 선잠을 잤습니다. 다음날은 헌병의 임무로 피폭자들을 다른 장소로 옮기는 등의 일을 하였습니다. 나는 화상을 입고 있었으나, 21세라 젊었기에 버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다음 날에는 못 일어났습니다. 모리타, 넌 입원이다. 그리하여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오노국민학교에 들어갔습니다. 학교를 임시병원으로 히로시마에 있던 군인들을 수용하고 있었습니다. 6,7,8일의 3일을 지나 입원하니 화상 부위에 구더기가 끓고 있었습니다. 꿈실거리는 구더기가 살을 파먹고 입원하자마자 죽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구더기만 쓰레받기를 3번 담을만큼 나왔습니다.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다친 사람이 수다하였습니다.
 
상태 좋은 병사가 학교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지나가는 군의관에게 '머리카락이 빠지는데요.'라 물었습니다. '강렬한 광선으로 모근을 당했으니 조금 있으면 또 자랄거야.'라 하셨으나 방사선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더니 다음은 얼굴에 반점이 생기고 잇몸에서는 피가 나오고.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납니다. 그리 되면 링거 주사를 놓지만 이미 때는 늦습니다. 이어서 혈변을 보고 피를 토한 다음, 차갑게 변하면서 죽어갑니다. 죽으면 다친 부위, 화상 입은 부위에서 구더기가 꿈틀꿈틀 차가워진 몸 밖으로 기어나가는 겁니다. 이 세상의 지옥입니다. 그게 한 구 두 구가 아니지요. 입원한 병사 모두 그렇게 죽어갑니다. 생지옥, 그런 상황였습니다. 8월 15일, 라디오에서 중대방송이 있다고 합니다. 그 때는 병원에 있었습니다. 병원에 있던 병사들과 함께 들었습니다. '참기 어려움을 참고, 견디기 어려움을 견뎌...'란 천황의 목소리를 듣고 종전을 알았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루 말 못하는 심정이었습니다. 오노국민학교가 학교를 재개한다는 무렵의 일입니다. 임시병원은 폐쇠하여 피폭자들은 모두 오노육군병원으로 옮기라는 명이 나왔습니다. 그를 계기로, 나는 상태가 좋았기 때문에 퇴원하여 유키쵸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남은 피폭자들은 모두 오노육군병원에 들어갔습니다. 결국 마쿠라자키 태풍으로 인해 병원이 떠내려가, 입원해있던 사람들과 피폭자 조사로 와있던 대학 교수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다음해 2월에 히로시마 시내로 돌아가서 화재로 폐허가 된 후나이리카와구치쵸에서 시계방을 열었습니다.
 
【브라질에】
피폭된지 10년 될 즈음 백혈병이 발병했습니다. 백혈구가 늘어나고 열이 나면 말라리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렸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이 나에게 이불을 씌어 위에서 억누르는 일들이 2년 지속되었습니다. 때문에 이상하다고는 느꼈지만, 그러한 상태였습니다. 피폭 11년째, 브라질에서 귀국했다는 한 노인이 우리 가게에 와서 브라질로 권유했지만, 그 때는 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 분은 '브라질 상파울로는 해발 800미터로 기후도 좋고 파리도 벼룩도 도둑도 없다'며 마치 신의 나라처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때는 얘기를 흘려 들었으나, 그가 가서 일 년 사이에 일본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이미 시계방이란 장사는 성립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전지시계로 바뀌어 시계수리 따위 수요는 없었지요. 원폭증도 나타나 '피폭 당한 당신네 부부한테는 좋을 것'이란 조언도 있고해서 제 생각은 바뀌었지요. 부모님과 친척 모두가 말렸으나, 나는 브라질 행을 결심했습니다. 배로 고베에서 2월2일에 출발했습니다. 일본인 마을에 조그마한 모리타 시계방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오시는 손님은 브라질사람 뿐이었습니다. 언어를 몰라, 결국 가게는 있다가 문을 닫았습니다. 말을 익히기 위해 유태인계 브라질인의 시계방에 시계 직공으로서 근무했습니다. 말을 배우고 생활을 꾸려 나갔습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열심히 삯일을 하였지요. 일본인이었고 정직함을 인정 받아, 가게 열쇠는 전부 내가 맡고 지배인 비슷하게 1984년까지 근무했습니다. 아이들도 대학을 나와 결혼했습니다.
 
【피폭자협회 설립】
브라질에도 피폭자가 있다고 알고 있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지원 하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피폭자를 구제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가족들과 상담하여 신문사 협조도 받고 피폭자는 모리타를 찾아 주세요. 모임을 만들렵니다.' 그리하여 27명이 모여 협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내가 회장을 맡고 사무국장은 제 아내가 맡았습니다. 1984년에 협회를 설립하고 그 해에 정관 등을 들고 자비로 19년만에 히로시마로 귀국하였습니다. 아내가 열심히 모은 돈도 여비로 했습니다. 후생성을 찾았으나 '나라를 버리고 브라질에 갔으니, 일본은 아무것도 해줄게 없다. 브라질국에 부탁해라'는 차가운 말이었습니다.
 
그것이 이민의 실태였습니다, 외무성에 상파울로 영사관에 주재하신 분이 계셨습니다. 그 당시 북미의 피폭자들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의사단이 2년에 한 번씩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저는 남미에도 피폭자들이 있으니 와달라고 부탁했고 그 이듬해부터 의사단이 와주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후생성, 외무성, 히로시마현, 나가사키현의 4자 공동사업으로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쿄의 시이나 변호사와 제 처가 처음 이야기 했을 때, '일본정부는 재외피폭자에 대해서는 원조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재판 외에 길이 없습니다'라고 확실히 말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상대로 소송할 생각은 없어 그대로 두었습니다. 허나 역시 맞는 말이었습니다. 마지막에는 국가에 대해 소송을 걸지 않으면 안되였고 재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피폭자들에게 말했으나 모두 반대였습니다. '모리타씨, 재판만은 하지 말아다오. 나는 브라질에 있어도 일본인이며 피폭자라 해도 일본인이기에 자기 나라와의 재판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 나는 재판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그 덕분에 저희 피폭자들도 건강관리수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증오를 넘어서】
8월 6일의 지옥을 이 눈으로 보았습니다. 숨을 거두는 학생들이 한결같이 '군인아저씨,원수를 갚아 주세요'라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그 때는 원수를 갚아 주자는 강한 결심도 그 날 사이에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전철 안, 히로시마 시내, 강에 있은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에는 복수심 따위 없습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되풀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마음. 그것이 그 후의 나의 평화활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현재 브라질에서 저희 피폭자협회 회원들은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서투른 포르투갈어이지만 현지 말을 써서 젊은 브라질 학생들에게 히로시마에서의 피폭체험과 평화의 소중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 피폭자들의 모습은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것, 나가사키가 최후의 피폭지이어야만 된다는 것을 목숨 걸고 전하고 평화를 호소하는 것이 우리들의 일이라 명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남은 여생도 평화를 알리는 일에 전념할 것을 약속합니다.
 
 
번역: 이동현, 김선우
번역감수:  이경자
번역 코디네이터: NET-GTAS(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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