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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9일,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세계에서 두 번째 원폭 인체실험이 실시되었습니다. 비인도적인 일이었으며, 정말 비참한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16세였던 저는 나가사키시립 상업학교 5학년이었으며 근로 노동 학생으로서 1943년부터 미쓰비시 무기제작소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수일 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아 그날은 근처에 있는 나가사키 대학병원(나가사키시 사카모토마치, 폭심지에서 0.7Km)의 3층 대합실에서 진료를 받기 위하여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11시 2분) 갑자기 주위의 창문에 파란 섬광이 보이고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낀 순간, 일대가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그 사이에 나는 의자 아래로 몸을 숨겼습니다.
별생각 없이 만진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등에서 왼쪽 다리에 걸쳐 유리창의 파편들로 인해 상처를 입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남자는 항상 각반을 감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각반을 붕대 대신 사용해서 응급처치를 하며, 어둠 속에서 계단을 더듬어 찾아 옥외로 대피했습니다. 도중에 계단에서 신음하고 있는 사람, 움직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 등을 도와줄 여유도 없이 병원의 현관을 찾아 병원 뒤편에 있는 아나코보(穴弘法)산으로 피난했습니다. 거기서 시내를 바라보니 미쓰비시 제철소와 대학병원의 굴뚝이 구부러져 있고, 일대는 건물 한 채 없는 허허벌판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주위에는 사람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급히 집(나가사키시 다케노쿠보마치) 쪽으로 발을 옮겼지만, 가는 길은 불바다 상태로 전차는 구겨져 검은 재가 되어 있었으며 그 안에는 성별조차 분간할 수 없는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말은 쓰러지거나 다리를 든 채 검은 숯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 부모가 몸으로 자녀를 감싸 안은 채 죽은 모습, 자전거를 탄 채 다리의 난간에 끼어 검게 타버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방공호 안에서 소리가 들리지만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으며, 우라카미강을 보니 수많은 남녀와 아이들의 시체가 떠다녀 마치 생지옥을 연상시켰습니다. 가까스로 도착한 집은 완전히 불에 타 형태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에는 쉬지 않고 적의 정찰기가 나가사키 상공을 선회하며 조명탄을 투하하며 상황을 정찰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불타는 붉은 밤하늘을 쳐다보며 이나사(稲佐) 산기슭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저희 가족은 양친과 남동생, 여동생 여섯을 합해 전부 아홉 명이었습니다. 다음날 우연히 아버지와 두 여동생(장녀, 차녀)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두 남동생(둘째, 셋째 남동생), 그리고 다른 두 여동생(셋째, 넷째 여동생) 이렇게 다섯 명은 일순간에 신형폭탄에 의해 불에 타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혼자서 가족의 시신을 화장한 뒤, 8월 13일 유골을 가슴에 안고 남은 네 명의 가족(아버지, 장녀, 차녀, 나)과 함께 임시열차를 타고 아버지의 본적지인 미나미타카키군(南高来郡) 미나미아리마쵸(南有馬町) 요시카와(吉川)로 피난했습니다. 살아남은 두 여동생은 직장에서 달려온 아버지가 쓰러진 가옥의 잔해 가운데서 구출했지만, 결국 방사능을 견디지 못하고 간호한 보람도 없이 종전일인 8월 15일에 장녀는 차녀를, 차녀는 장녀를 서로 걱정하며 고통스럽게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 아버지와 둘이서 생활해 왔지만, 아버지는 1969년 2월에 갑자기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7년간 병상에 누운 채 결국 일어나시지 못하고 1975년 1월에 76세의 나이로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참혹함과 끔찍함은 제 뇌리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피폭에 의해 죽어간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현재에도 치료를 받고 있는 분들, 그리고 병상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고통 받고 있는 분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의 마음을 전합니다. 하루빨리 핵무기가 없는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모두 함께 힘을 모아 노력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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