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다니 슈이치 씨. 당시 16세. 돗토리현립 돗토리 제1중학교 4학년이였습니다. 육군경리학교의 시험을 보기 위해 히로시마를 찾아가,폭심지로부터 1킬로 떨어진 호리카와쵸의 여관에서 피폭. 외상은 없었지만,구토와 설사에 시달렸습니다. 친구를 살려주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는 이다니씨. 현재는 지역의 어린이,외국인들에게 방사능의 공포를 전하는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세상에서 핵무기가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하십니다.
【수험을 위해 히로시마로】
중학교에 들어가자,목소리가 크다고 학급반장으로 지목되었습니다. 당시,중학교는 이미 군대와 같은 조직으로 되어 있었기에 저는 중대장으로서,아침부터 저녁까지 호령을 내리는 역할이 주어집니다. 그리하여 끝에는 완전히 군국주의 소년으로 물들이는 과정이 있은 것입니다. 그 당시,가장 동경하던 해군병학교의 시험을 보았으나 불합격이 되었습니다. 어찌해서든 천황을 위해 한 몫 다하고 싶어서,남은 군의 학교인 육군경리학교 시험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수험일은 1945년 8월 6일,장소는 히로시마였습니다. 돗토리현 전역에서 8,9명의 같은 또래 학생이 인솔관을 따라 같은 기차를 타고 시험을 보러 갔습니다. 시험 전날인 8월 5일에 도착했던 무렵에는 이미 주변은 어두웠습니다. 여름철인데 어두웠으니,아마 오후 8시 전후였을 것입니다.
【원폭 당일의 상황】
아침밥을 먹고나니 인솔관이 '자,이제 가자'고 소리를 걸었습니다. 그 순간,공습경보가 울렸습니다. 나는 그 얄미운 미군 비행기를 그나마 한 번 보기만이라도 보려고 두 팔로 복도 기둥을 끌어안고 정원 끄트머리에서 위를 바라본 순간, 번쩍하는 섬광에 이윽고 폭팔음이 났습니다. 그리고 나는 폭풍으로 날라 갔습니다. TV 만화에서 흔히 사람이 공중으로 날라 가는 장면이 나오지만 마치 그런 모습으로 날라 갔습니다. 그 사이에 여관이 무너져,나는 건물 밑에 깔려버렸지요. 그 순간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사람 살려줘'란 목소리에 조금씩 정신이 들었으나 캄캄한 어둠에 덮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금 전의 폭발음으로 폭격 당했음에 틀림없다고 짐작했으나 다행히도 나는 지붕이 무너지면서 찌그러진 마루청 아래로 다타미가 기울어져 거기를 미끄럼대처럼 굴러 마루 밑 공간에 빠졌습니다. 때문에 외상도 화상도 없었던 것이 저 역시 신기할 정도입니다. 개나 고양이가 들락거릴만한 작은 구멍이 마루 밑에 뚫려 있잖아요. 거기에서 거의 알몸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옷을 꺼냈습니다. 만약 체격이 좀더 좋았더라면,그 구멍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밖에 나가보니,이미 몇 친구들이 나와 있었고 무너진 지붕의 기와장 위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는 남보다 늦게 빠져나왔을 것입니다. 인솔관은 머리에 셔츠같은 것을 붕대 삼아 감고 있었기에 머리에 부상을 당한 거겠죠. 다른 사람은 신기하게도 외상은 없었어요. 유일하게 외상을 입은 친구는 그 중의 다른 한 명의 등에 업혀서 돗토리까지 돌아오게 되는데, 바로 작년까지 살아있었습니다. 등에 업어준 친구가 오히려 급성원폭증으로 있다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리하여 불이 없는 쪽으로 도망쳤습니다. 맨발로 유리조각이 흩어진 곳을 도망 가는데, 왜 발바닥에 파편이 찔리지 않았는지. 불 속을 방화용수의 물을 서로 머리부터 뒤집어 씌우면서 피난 갔는데 왜 화상을 입지 않았는지 등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들 뿐이에요. 피난 길에 '살려달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럼 갑시다'라 하여 그의 손을 잡아 당기니 피부가 스르르 마치 장갑처럼 벗겼습니다. 또는 병사가 들보(속옷)의 끈 하나만의 차림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등 여러가지 보았지만 벌써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어쨌든 불이 없는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아무래도 이 지도를 보니 츠루미바시를 건넌 부근이라 짐작되는데, 풀밭이었던 곳에 뒤로 벌렁 쓰러졌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하늘에 낀 원폭구름이 눈 속에 들어왔습니다. 그때까지는 곧장 밑을 보고 피난하느라 위에 그런 구름이 덮은 줄 몰랐습니다. 처음으로 이렇게 위를 향해 드러누웠을 때,바로 위에 구름이 있었습니다. 색은 연한 회색이며, 무지개색으로 반짝이면서 부풀어 오르고 있었습니다.
이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는 그늘이란 그늘을 찾아보지 못했어요.건물도 사라져 나무도 전부 타버렸으니. 햇볕에 쨍쨍 쪼인 상태였으니,이야말로 단비라 하면서 입을 벌려 마셨습니다. 그래도 부족해서 근처의 우물에서 물을 퍼마신 순간,구역질과 설사가 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왠지 다른 한 친구도 마셨을텐데 그는 설사도 구역질도 없었습니다. 결국 어찌 해야될지 갈피를 잡지 못해,그는 시골에서 나온 친구여서 '어떻하노'라 돗토리의 순시골 사투리로 했던 말이 때마침 옆을 지난 병사의 귀에 들은 거겠죠. 그 병사가 돗토리 출신으로 '너희들은 돗토리지'라 하면서 병사네 집에 데려가줘,거기서 쉴 수 있었습니다.
【피폭 후의 상황】
집은 많이 부서지기는 해도 무너져 있지는 않았으니,아마 히지야마 산의 반대편이 아닐까요. 병사네 집에서 거두어 주지 않았다면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었으니 과연 어찌 되었을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저는 그런 상태였으니,계속 드러눕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먹어도 바로 토해내었기 때문에 비실비실해서 맥이 없었습니다. 저녁이면 시체를 태우는 냄새가 계속 풍겨오지, 시체를 태우는 불이 여기저기에 보였으니,이건 거의 전멸상태일지도 모른다 싶었지요. 같이 있던 친구가 시내를 정찰하러 갔다가 보고 온 상황을 알려주기도 하였으니까요. 이제는 전멸상태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그는 희한하게도 기운이 좋았기 때문에 소위 피폭증명을 받으러 가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증명서로 4일째에 공짜 기차에 탈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의 재회】
돗토리역에서 걸어서 집으로 가는 도중에 친척 집이 있어, 거기에 당도하자 모두가 놀랐습니다. 제 집에 전화를 해줘서 형이 마중 나와줬어요. 그런데 형은 제 다리가 과연 정말 붙어있는지 자꾸만 쳐다보는 거에요. 혹시 유령이 아니냐고. 그런 경위로 업혀서 여기까지 돌아왔습니다만 불단에는 등명이 켜져 있어,제가 죽은 걸로 되어 있었습니다. 불단 앞에 정좌해서 '지금 다녀왔습니다.심려를 끼쳐 드렸습니다.'라고 마치 어엿한 군인처럼 인사했습니다. 얘기로는 그 다음날에는 형과 모친이 저의 뼈를 주우러 히로시마로 출발하게 되어 있었답니다. 그러니 하루 늦었으면 2차 피폭을 받았겠고 피폭 받은 사람들은 암에 걸리거나 피를 토하면서 죽었다고 나중에 들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그런 상황에 처했을지 모른다 싶으면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회피한 거겠지요.
【피복 후의 후유증에 대해서】
톳토리에 돌아온 후,고열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급성원폭증이지요. 그러던 중,패전을 맞이하였어요. 어찌할 바를 몰라 이리 머리를 앓았더니,손에다 머리카락이 한꺼번에 빠졌어요. 그러나 그게 큰 문제였겠나요. 앞으로 일본은 어찌 될까, 미군이 상륙해오면 어찌 될까, 그런 생각만이 머리 속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생각은 막다르고, 눈을 감으면 피복 받은 피난 길에서 본 끔찍한 상황들이 꿈에 나타났습니다. 저는 잠을 못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덧문에 실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 당시에는 의약품은 모두 군에만 제공되어 있었기에 민간 병원에는 약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를 담당한 의사가 헌혈에 협조해 주도록 제 친구들에게 부탁해 주셨어요. 그러니 몇십 명이란 친구들이 소매를 걷고 적집자병원으로 밀려 왔어요. 저의 혈액형이 A형이라, 선생님을 포함해 A형 O형의 열 몇명이 헌혈해주었지요. 그들의 피가 지금도 내 몸에 흐르고 있고,그로하여 내 생이 주어지고 있다고 느낄수 밖에 없네요. 덕분에 결국 열도 내렸습니다. 친구들이 몇 킬로나 떨어진 항구 마을까지 자전거로 양동이를 들고 가서 생선을 식히는 얼음을 더운 날씨에도 먼 길을 가져다 주기도 하였습니다. 또 내 밑에 어린 동생들이 있었는데 친구들이 돌봐주기도 하였습니다. 모친이 간병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힘써주었으니, 참으로 친구들이 내 목숨을 건져 주었다고 생각하군요.
【방사능의 공포 핵무기 철폐에 대한 마음】
안에는 자기 부모나 형제들을 구출하지 못한채 피난 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저의 경우,오로지 하룻밤의 친구였어도 역시 제 혼자 도망가 살아남은데 대해 아무래도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을 뿌리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자책감이 강한 사람들이 저도 마찬가지로 원수폭 금지운동에 정열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공민관 등에서 어린이들에게 이야기를 하는데, 어린이들은 원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저 번쩍 빛나고 쾅 울려 구더기가 들끓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어서 대학생도 그 이야기는 다 들었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방사선 등의 이야기에 이르면 '뭐죠? 처음 듣습니다.'라 하면서 열심히 듣게 됩니다. 때문에 흔히 아는 원폭 이야기만이 아니라 좀더 상세하게 전해야 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감상문을 반드시 써 받습니다. 그러자 전쟁 반대라는 생각을 초등학생이라도 다 해주게 되고 원폭에서 제일 무서운 게 방사선이라는 것까지 확실히 전달되어와 있는 걸 보면 기쁩니다.
특히 미국 방문 시의 경험으로는 미국에서도 그런 일들은 은폐되어서 잘 알려있지 않았으니 대형폭탄 정도로만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으로는 대형폭탄이 아니라 방사선 무기라는 것, 방사선에 의해 유전적 영향도 나온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이제야 알게 되었지요. 64년이 지나서야 세계가 그런 정확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건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와 같은 원폭 체험자들이 방방곡곡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저도 해외를 8회정도 다녔을 정도이니. 이런 활동이 세상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조금은 보탬이 된 것 같으네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정말로 핵무기를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번역: 이동현, 조연휘, 이진희
번역감수: 이경자
번역 코디네이트: NET-GTAS(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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