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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기윤(BE Kiyun) 
성별 남성  피폭 시 연령 13세 
촬영일 2012년7월1일  촬영 당시 연령 80세 
피폭지 히로시마(직접피폭 원폭 낙하 중심지와의 거리:2.0km) 
피폭 장소 히로시마 시 미나미 정[현재의히로시마 시 미나미 구] 
피폭 시 직업 등 학생 
피폭 시 소속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상업학교 
소속관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 
한국어 녹음/자막 자막 

배기윤 씨. 당시 13살 폭심지로부터 약 2km의 미나미정에서 피폭.  화상을 입어 얼굴이 몹시 부어서 눈을 뜰 수도, 입으로 물을 마실 수도 없었고 아버지와 형이 니노시마의 구호소로 데리러 왔을 때는 죽기 직전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름에도 긴 소매옷을 입어서 화상의 흉터를 숨기고, 피폭자라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원자폭탄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아 왔습니다.  핵무기는 절대 사용해서는 안된다라는 것을 말합니다. 

【피폭 전의 생활】
학교는 히가시칸온 정에 있는 간온 국민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상업학교를  17대 1의 경쟁률로 합격했었습니다.  그때는 니시칸온 정에 살았었습니다.  당시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누나, 형, 남동생들과 저 이렇게 8명 정도의 대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일을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집에서 검도용 도구를 꿰매는 일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나는 간온혼 정의 큰 길 모퉁이에 있는 통조림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형은 히로시마역의 티켓을 인쇄하는 인쇄소를 다니며,  밤에는 야간 중학교를 다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항상 배부른 식사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같은 처지였다고 생각합니다.  군부대의 창고에 가서 무기를 청소하기도 했습니다.  주로 우지나로 가서 설탕이나 다른 많은 짐을 배에서 운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당시의 학생들은 대부분 공부를 충분히 할 수 없었습니다. 

【8월 6일】
언제나처럼 간온바시를 건너 학교로 갔었습니다.  공습경보가 해제되어 운동장에 모두 모여 있었습니다.  그때 B29 폭격기가 날라왔습니다.  흰 구름이 흘러가듯 B29가 나타나서 학생들이 모두 '어, B29다' 'B29다'하고 말하며 하늘을 보고 있을 때,  이 정도의 새빨간 구슬이 폭격기에서 떨어졌습니다. 새빨갰습니다. 광이 없는 새빨간 공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보면 볼수록 점점 커졌으며, 번쩍! 그것이 제가 본 전부입니다.  의식이 돌아왔을 때에는 한밤중인 것처럼 새까만 세계로, 재와 먼지 같은 것이 떠있었습니다.  그것들이 전부 가라앉은 후 밝아졌고, 저는 조례대 안에 앉아있었습니다.  도망쳐 들어온 것인지 나가떨어진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뒤통수가 아파서 손으로 만져보니 두부처럼 말랑말랑했고,  얼굴에 손을 대어 보니 부어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아직 눈 붓기가 적었기 때문에 보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운동장을 보니, 친구들도 대부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폭풍으로 모두 날아가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때의 일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필사적으로 살기 위해서 큰 길가로 나왔었습니다.  누구인지는 모릅니다만, 누군가의 손을 잡았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분이 학생이었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분이 저를 우지나 쪽으로 데리고 가 주셨었습니다.  그렇게 조금 걷다 보니 얼굴이 부어버려서 눈이 감겨졌기 때문에 우지나의 모습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지나 쪽으로 왔던 것 같습니다.  저같이 빛을 맞은 사람들과 피부가 벗겨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부인회에서 주먹밥 같은 것을 주셨지만,  저는 얼굴이 부어서 입이 불편하여,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지나에서 니노시마까지 배를 탔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습니다.

【니노시마에서의 모습】
니노시마에서는 판자 위였는지, 멍석 위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큰 창고 같은 곳에 누워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와 형이 저를 데리러 오실 때까지 있었습니다. 움직이는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냄새가 엄청 심했었습니다.  크게 외치는 소리, 신음하는 소리, '살려줘'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잔혹하다고 할까 그러한 풍경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입술이 부었고, 얼굴도 부어있었기 때문에 먹거나 마시는 것은 할 수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물을 주어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께서 구하러 오셨을 때는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고, 통증도 없었고, 곧 죽기 직전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형이 저를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당시, 제 이름은 '호시야마 모토지'였습니다.  ' '모토지'라고 불리는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습니다.  제가 대답을 했었는지, 손을 흔들었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살려줬습니다.  작은 배로 바다를 건널 때, Grumman 전투기가 배 위를 지나가며 무언가를 떨어뜨려서 배가 흔들렸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그 후에는 차를 타고 우시타까지 갔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일본에는 다이하치쿠루마라고 하는 수레가 있어서 그것을 탔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습니다. 의식을 잃고 나서 2, 3일 후에 의식이 돌아왔습니다.

【가족의 간호를 받음】
전쟁이 끝난 8월 15일은 일본의 천황이 라디오에서 발표했던 것을 조금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계속 누워있었기 때문에 주변의 모습은 잘 몰랐습니다.  물론 많은 일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 때문에 형제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약이 없었기 때문에 풀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묶어 돌로 갈아 즙을 내어 제 몸에 발랐습니다.  약이라고는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 풀도 점점 없어졌기 때문에 멀리까지 가서 그 풀을 찾았고, 형제들이 정말 많이 고생했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은 없었습니다. 시내의 병원은 전부 무너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병원에 갈 수 있는 여력도 없었습니다.

【한국으로 귀국】
12월에 한국으로 귀국할 때, 작은 어선을 타고 시모노세키까지 가는 데, 24시간 정도가 걸렸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모노세키에 모여있었습니다.  그 귀국선을 타기 위해서는 순서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센자키라고 하는 항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2, 3주 정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작은 항구였기 때문에 미국의 병원선이 가까이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먼 바다에 정박해 있는 병원선까지 작은 배를 타고 가서 갈아탄 후, 부산으로 귀국했습니다.

【한국에서의 생활】
한국에 돌아와서도 화상의 흔적을 치료하기 위해 고생을 했습니다.  형제들은 일본어만 할 줄 알고, 한국어는 한마디도 못했습니다.  한국어를 배우는데 힘들었습니다. 학교는 다닌 적이 없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학교에 다닐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식사는, 대가족이었기 때문에 옥수수의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로 삶아서 먹었습니다.  화상이 완전히 치료되기까지는 4, 5년이 걸렸습니다.  집에서 치료를 한다고 해도, 포비돈 요오드 빨간약을 바르는 것뿐이었습니다.  빨간약을 바르지 않으면 바로 구더기가 생겼습니다. 빨간약을 바르는 것만이 치료의 전부였습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목까지 오는 긴 옷이 유행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행히도 여름에 그런 옷을 입고 일을 했습니다.  목욕을 할 때에는 대중탕이 아닌, 혼자만 들어가는 독탕(단독으로 사용하는 탕)이라는 것이 있어서 조금 비싸지만, 꼭 그곳에 갔었습니다.

여러모로 스트레스가 많았고,  또 조금만 무리를 하면 니노시마에서의 그 악취가 다시 나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은 예전과 같은 일은 없지만, 그때는 항상 몸이 조금 나른하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하면 악취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수십 년간 그래왔습니다.  여름에는 옷이 얇아지기 때문에 여름이 가장 싫었습니다. 여름이 되면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에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원폭의 피해자라는 것을 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들이 2명, 딸이 1명으로 모두 3명입니다.  다행히 자식들은 원폭의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피폭의 영향】
지금도 많은 병을 갖고 있습니다.  고혈압과 당뇨와 순환기 기능 장애,  신경성 통증, 경색증도 조금 있으며,  많은 약을 먹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생활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지만,  나이를 먹어 70대가 되고 나서는 일본이 의지가 되었습니다.  히로시마의 방문도 이번이 3번째입니다. 오사카와 나가사키의 병원에도 갔었습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일본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많은 피폭자들도 저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이 피폭자라고 하는 것을 말하면, 자식들의 결혼에 영향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금은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아직도 제가 피폭자라는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습니다.  수 십년이 지났기 때문에 화상의 흔적이 조금은 나아졌습니다만, 예전에는 새까맸었습니다.  지금은 조금 하애졌지만 젊었을 때에는 화상의 상처가 정말 미웠습니다.  타이어 공장에서 기술자로서 일을 했었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배를 만드는 목수로 일을 한 적도 있습니다.  탄광의 착암기 기술자가 된 적도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충청북도의 괴산이라는 곳에 토지를 사고, 그곳에서 농업을 시작했습니다.

【전하고 싶은 것】
원자폭탄 때문에, 저는 평생을 힘들게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는 저 뿐만이 아닙니다.  해외의 피폭자, 국내의 피폭자 모두 저와 같이 고생을 하며 평생을 살아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핵 전쟁은 전 세계에서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일반적인 전쟁이었다면, 핵으로 인한 피폭자들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며, 이러한 고생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핵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모두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제작 주식회사 아에라스
번역 : 임 산경
번역감수 : 가와무라 유키
번역 코디네이터 : NET-GTAS (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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