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모리 토시키씨. 당시 1살4개월 폭심지에서 약2.3km 의 우시타정에서 피폭 건물 분산 작업에 동원된 누나 토시코가 돌아오지 않아서 가족은 폭심지 근처를 계속해서 찾아 다녔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기왓조각과 자갈들, 강둑에 일렬로 눕혀있는 여학생들의 송장. 토시코씨는 보이지 않고, 가방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피폭체험을 구전으로 널리 세계로 알리면 전쟁도 핵병기도 없앨 수 있다. 한명이라도 많은 사람에게 그것을 호소하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피폭 전의 가족의 모습】
할아버지, 부모님, 저를 포함해서 9명의 형제자매, 12명의 대가족이었습니다. 가구제조업을 경영하며, 많은 제자를 두고, 꽤 북적거렸다고 들었습니다. 식량을 조달하기 위해서 어머니는 닭을 키우고 계란을 식량으로 하거나 야채, 호박, 토마토, 오이 등을 재배했습니다. 그것 만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어머니의 친정으로 식량을 얻으러 가거나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히가시히로시마시의 시와호리라는 취락이 있습니다. 거기가 어머니의 친정입니다. 저의 맏형과 둘째형이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히로시마시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피난해 있었습니다. 바로 위의 쌍둥이 누나들은 아직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친가 쪽에 가서 피난해 있었습니다. 형제가 9명이라서, 제일 위의 누나와 저는 20살 차이가 납니다. 피폭했을 때, 제일 위의 누나는 히로시마체신국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둘째누나인 야스코도 히로시마시의 서쪽에 위치한 이츠카이치의 선박사령부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셋째 누나는 히로시마시립 제1고등여학교 4학년이었습니다. 넷째 누나가 1학년이었습니다. 셋째 누나도 당시의 (주)니혼 제강소에서 대포나 총의 총알 등을 만드는 일에 학도 동원되었습니다. 마침 8월6일은 (주)니혼 제강소는 전휴일(전력부족으로 인해 전력공급이 멈추는 날)이라서 집에 있었습니다.
【8월6일】
8월6일은 제가 약간 몸상태가 안 좋아서 어머니가 저를 업고 히로시마 체신병원에 데려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경보가 울렸지만, 정찰기였기 때문에 공습도 아무 것도 없고 30분도 채 안 되서 7시반 넘어서 경보가 해제되었습니다. 히로시마시내의 전철이 움직이고,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업고 히로시마 체신병원에 가기 위해서 쿄바시가와의 강둑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코헤이바시와 칸다바시라는 다리가 남아있는데 그 중간 정도를 걷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경보는 해제되어 있었지만, B29의 소리가 들려서 어머니는 무슨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자세를 갖추었던 것 같습니다. 그 순간 원폭이 투하되어 폭발해, 저와 어머니는 날아가 버렸습니다. 폭심과 어머니와 제 사이에 2층짜리 민가가 있었습니다. 마침 그 건물이 그림자가 되어서 열선을 직접 쬐지는 않았습니다. 날아가서 강둑 밑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얼마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업혀 있었던 제가 어머니 배 쪽에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안아 강둑 위에 올라가니, 히로시마시의 중심부에 연기가 오르고 있었고, 뒤쪽도 불이 타 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어떻게 할까 우왕좌왕했다고 하는데, 어쨌든 불을 피하면서 우시다의 산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지금도 남아있는데, 옛날의 전쟁 당시의 기념탑이라고 하는데 산 중턱에 평지를 만들어서 콘크리트로 만든 기념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불을 피해서 거기로 도망쳐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 때는 정말 힘든 상황이었고, 아마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상태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일하러 가거나, 건물 분산작업하러 간 곳 주변이 불과 연기로 뒤덮어져,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는 우시다의 산으로 모인다는 약속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각각, 따로따로 우시다의 산으로 모이고 있었습니다. 집에 있었던 할아버지와 셋째 누나인 미사오는 폭발로 인한 바람 때문에 집이 무너져 밑에 깔려버렸습니다. 간신히 기어나와서 그 때는 상처투성이가 되었지만 울면서 우시다의 산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산으로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와 셋째 누나는 서로를 놓치면서도 따로따로 우시다의 산에 갔습니다. 첫째 누나는 히로시마체신국에 근무하고 있었기 때문에, 폭심지에서 아마 1.4키로 떨어진 건물 안에서 피폭했습니다. 폭심지에서 가깝기 때문에 건물 자체는 철근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무너지지 않았지만 건물 안은 엉망이 되어서 우시다의 산으로 도망쳐서 올라 온 것 같습니다. 첫째 누나도 상처 하나 없이 산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둘째 누나는 이츠카이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넷째 토시코는 물론 돌아오지 않습니다. 밑의 4명은 분산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히로시마역 근처의 히로시마 건축구라는 곳에 일하러 갔었기 때문에, 해가 지고 나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2명의 가족 중 4명이 분산 작업을 하고 있었고, 8명이 피폭하여 2명은 그 날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누나 토시코를 찾아서】
8월7일이 되어도 아직 불이 그을리고 연기도 피어오르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첫째 누나인 히데미와 아버지가 토시코를 찾으러 마을에 나갔습니다. 아버지가 위험하니까 안 된다고 말렸다고 하지만, 첫째인 히데미가 어떻게든 찾으러 가겠다고 해서 아버지와 함께 마을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때의 체험도, 어머니가 이야기할 때 아버지와 첫째 누나 히데미가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8월6일날에 아마 건물 분산작업을 했던 장소, 폭심지의 바로 근처인데, 그 곳을 찾으며 걸었다고 합니다. 결국 토시코는 찾지 못한 채 돌아와서, 그 다음날은 어머니가 저를 등에 업고 찾으러 나갔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찾으러 나갔지만, 결국 토시코의 송장은 못 찾았습니다. 절의 토담 쪽에 여러 사람들이 두고 간 천으로 된 가방을 찾았습니다. 토시코의 것이라는 것을 안의 물건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 유품은 어머니가 가지고 돌아가, 계속 집에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가방과 당시 입고 있었던 세라복을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에 기증했습니다. 세라복을 보면 놀랄 정도로 작은 거예요. 세월이 지나 줄어들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정말로 작은 세라복입니다. 8월7일 아침에 토시코를 찾으러 간 두 사람 말로는 아무튼 기왓조각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고 그 곳에 많은 시체가 굴러 다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강변이나 썰물이 되어 나온 하얀 모래 해변과 제방 위에 죽은 여학생의 시체들이 많이 있다던지, 아무튼 힘든 상태였다고 합니다. 원폭의 그림에 있지만, 물을 마시기 위해 방화용수에 얼굴부터 몸을 처박아 숨진 사람, 당시 운반에 쓰던 소나 말이 쓰러져 있었는데 8월이라서 점점 부패되어 퉁퉁 부풀어 있는 비참한 상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무튼, 좀 입에 담을 수 없는 상태였다고, 그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부모들이 자주 이야기했었던 건, 저녁에 불덩어리, 노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피폭 후이기 때문에, 가로등은 없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화학물질인 인(P)이 타고 있었던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건강 피해】
히로시마에 있었던 8명 모두가 어떠한 컨디션 불량을 일으켰다고 들었습니다. 자반이 올라온다던가 하면서 말이죠. 원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전 상반신이 곪아 붕대로 몸을 둘둘 감겼습니다. 제가 곧 죽을 것 같아 보였던 모양입니다. 모두들 머리카락이 빠졌다고 합니다. 놀랐긴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지식도 없었고 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었죠. 이러한 증상에 대해 알고 있는 의사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힘들었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 후의 생활】
저는 아직 젖먹이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체험은 기억에 없습니다. 어쨌든 배고프다는 생각은 줄곧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족들이 자주 말했던 것은 호박이네요. 물과 태양빛만 있으면 만들어지지만 그 호박이 맛있다는 보장은 없죠. 지금은 정말 달고 맛있는 호박이 시중에 나와 있지만 당시엔 더 이상 먹기 싫을 정도여도 그걸 먹을 수밖에 없는 생활을 이어나갔었습니다. 배급도 그리 풍족하진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친가는 농가였기 때문에 자주 식량을 사러 갔었던 모양입니다. 당시엔 식량을 사는 것이 통제되어 있어 그다지 자유롭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쌀을 사서 돌아오는 것이 발각되면 빼앗겼었습니다. 저도 그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하치홍마츠 역에서 내려 친가에서 쌀을 가져와 배낭에 넣어서 돌아올 때 열차 안에서 검사를 받아 전부 빼앗겼던 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 모두가 힘들게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피폭 2세에게 미치는 영향】
미사오는 자식이 2명이었지만 1960년을 전후로 장남이 소아마비에 걸렸습니다. 이건 원자폭탄이 원인이 아닌가 하고 미사오는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젠 두 번 다신 아이는 만들지 않겠다고 남편과 의논해 결정했던 모양입니다. 장남은 후유증이 남지 않고 증상이 가벼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차남이 오체만족으로 태어나 다행이라고 기뻐했었습니다. 차남이 4살이었던 여름에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져서 식욕이 없어졌습니다. 차남의 증세를 살펴보니 원자 폭탄이 떨어진 직후의 미사오의 증상과 꼭 닮아서 놀랐습니다. 입안이 부어 잇몸에서 피가 나거나 했습니다. 깜짝 놀라 히로시마 대학 병원에서 진찰을 받고 림프성 급성 백혈병이라고 진단받았습니다. 당시엔 그 병명을 진단받으면 이제 삶이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미사오는 크나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차남은 바로 5살이 되어 그다음 해에 6살이 되어도 입퇴원을 반복했었습니다. 7살이었던 초등학교 1학년 겨울에 백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본인에게도 가족에게도 매우 힘들었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쓴 “난 살고 싶었어”라는 투병기를 어느 작가분이 편집한 것과 그림책으로 만든 것 2종류가 발행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피폭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제 어머니께선 특이하지만 매년 8월 6일에 한해서 아이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었습니다. 언제나 말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머니께서 이야기하시면 아버지나 누나들도 가세해 자신의 체험을 들려줬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이 말해준 이야기는 제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당시 전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선 언제나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눈물을 흘릴 정도로 괴로우면 왜 이야기하시는 거냐고 어머니께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선 “너희들에게 똑같은 일을 당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저에겐 피폭 체험을 말하는 것이 어떻게 같은 일을 당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선 피폭 체험을 말로 전달함으로써 이런 일을 다시는 일으켜선 안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 원자 폭탄이 투하되는 일이 없어질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알고 계셨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자신의 체험을 아이에게 말해줬었다는 사실을 제가 정년퇴직하고 나서야 이해했다고 느꼈습니다.
피폭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말은 두 번 다시는 피폭자를 만들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핵 전쟁과 핵무기를 없앤다는 일입니다. 핵무기를 없애는 일 이외엔 다신 피폭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을 할 수 없습니다. 핵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 그리고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제 핵 무기를 없앨 것. 그 방법 이외로는 지구의 안전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 저희들의 생각입니다. 핵 무기 폐기를 목표로 세계에 고발해 나가고 싶습니다. “지금의 청자는 내일의 화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피폭자의 이야기를 들은 분께서 내일은 화자가 되어 주셨으면 하는 취지입니다. 피폭 체험을 널리 퍼지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피폭자가 또다시 원폭 피해자들을 만들지 말라고 보복을 생각지 않는다는 것에 아마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피폭자의 호소를 좀 더 세계에 넓혀 모두를 한마음으로 만들어나가면 전쟁도 핵 무기도 없애는 일에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핵이 사라질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해 나가고 싶습니다.
번역:조지영 후지이 미키
번역감수:죄순육 나가하마 타쿠마
번역코디네이트:NET-GTAS(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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