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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하타 요시테루(KOHATA Yoshiteru) 
성별 남성  피폭 시 연령 16세 
촬영일 2005년10월16일  촬영 당시 연령 76세 
피폭지 나가사키(입시피폭) 
피폭 장소  
피폭 시 직업 등 학생 
피폭 시 소속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 중학교 
소속관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 
한국어 녹음/자막 자막 

고하타 요시테루. 당시 16세 나가사키현립 이사하야 중학교의 4학년이었습니다. 전쟁 상황이 어려워지면서, 수업 대신 공장에서 발동기의 수리를 돕는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나가사키시 상공에 떠오른 이상한 검은 구름을 멀리 떨어진 산에서 봤습니다. 그 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체를 운반하게 되었습니다.

아사하야 중학교를 다녔으며, 하숙을 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작은아버지가 만주에 계셨는데, 그분의 도움으로 학비를 송금 받아서, 중학교는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중학교 4학년 때 원폭을 맞았습니다. 당시에는,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면, 봉사 작업이라고 하여, 농가의 일을 도와드리기도 했습니다. 일할 사람이 군에 입대하였기 때문에 일손이 부족했었습니다. 중학교 1학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공부를 했었습니다. 그때가 1942년이었습니다. 1943년이 되자, 공부 대신 학도 동원이 되었습니다. 공장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오무라의 해군항공창이 공습을 받아 발동기의 수리부만 아사하야로 소개되어 왔기 때문에 산에 공장을 만들어 그곳에서 수리를 했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4학년 때였습니다. 그러한 일을 했었습니다만, 1945년이 되자, 수리해야 할 발동기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송근유의 원료가 되는 소나무의 뿌리를 뽑으러 갔었습니다. 소나무의 뿌리를 뽑을 때 원폭이 터졌습니다.

11시쯤이었습니다. 8월에 땀투성이로 소나무의 뿌리를 파내는 중노동이었습니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난, 대 폭발음이었습니다. 옆에 떨어졌다고 생각해서, 휴식이라 누워있었지만, 놀라서 바로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나가사키의 방향에서 검은 연기가 점점 피어올랐습니다. 그것에 놀라, 트럭 2대, 60명 정도가 산속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가사키로 급히 달려갔습니다.

【참상】
돌아오는 도중,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피범벅이 되고, 피부가 늘어져서 거의 아무것도 입지 않은 듯한 모습으로 이사하야의 방향으로 울부짖으며 도망쳐오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트럭 위에서 어떻게 할 수도 없었고, 목적지는 우라카미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기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폭탄은 일반적인 폭탄이 아니구나 하며 놀란 채로 이동을 했습니다. 우라카미 지구에 들어서자, 그곳은 집이 다 무너지고, 사람도 없는 불타버린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가서 구호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이나,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에 놀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서리를 치며, 구호를 했습니다.

8월의 한여름이라, 죽은 사람의 눈언저리에 파리가 모여들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많은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파리가 알을 낳는다고 생각했는데 구더기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옆에는 살아있지만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의 상처로도 옮겨가는 것이었습니다. 머큐로크롬(빨간약)이라는 약이 있어서, 얼굴에도 바르는데, 얼굴 전체가 상처투성이라, 바들바들 떨며 빨간약을 바르면 점점 얼굴이 빨갛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 의대도 이미 공습을 받아, 옆의 군의는 마취약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여성의 겨드랑이 아래를, 마취도 하지 않은 채로 가위로 잘라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 마세요, 하지 마세요'라는 울부짖는 목소리는 가장 충격이었습니다.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을 수 없는 것】
무서워하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군인으로부터 '뭘 떨고 있는 거야'라고 기합을 받았습니다. '이번엔 너희가 시체를 옮긴다'라고 들어서, 2명이서 사망자를 들것으로 옮기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멀었습니다. 산속이며 심지어 언덕길이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산이 많으니까요. 몇십 번이나 옮겼는지, 어떻게 옮겼는지 전혀 기억이 없습니다. 장갑도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에, 둘이서 맨손으로 들것에 실었습니다. 산 정상에는 구멍을 파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옮기기를 담당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무서워서 뛰어 내려왔습니다. 또다시 옮겨야 하는 것을 알지만, 너무 징그러워서 들것을 들고 친구와 뛰어 내려온 기억이 있습니다. 이를 수 십 번 했습니다.

밤에는 노숙을 했습니다.  아무 건물도 없는 상황이라, 어떤 곳에서 노숙을 했는지 기억이 없습니다만. 그때는 먹을 것도 부족했기 때문에, 흰밥 같은 것을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주먹밥을 받아봤자, 원폭 때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라,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산속이기 때문에 모기가 살아 있었습니다. 밤이 되면 모기 큰 무리 때문에 전혀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원폭이 생각나 그 상황이 떠오르고, 모기에도 시달려서 수면을 취할 수 없는 채 3일간 보냈습니다. 3일간 노숙을 했습니다. 중학교에 돌아가도 이사하야의 국민학교, 중학교는 전부 사망자의 안치소가 되어있었습니다. 죽은 사람을 강당으로 모았습니다. 학교에 돌아갔지만, 역시 같은 일을 했습니다. 석회 같은 것을 시체에 뿌렸는데, 새하얗게 될 때까지 뿌렸습니다. 8월 9일부터 전쟁이 끝나는 8월 15일까지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8월 15일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말하기 그렇지만, 정말 전쟁이 끝나서 다행이라고 안심했습니다. 원폭 때 나가사키의 참상을 봤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전쟁에서 졌다는 것보다, 전쟁이라는 것이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피폭자에 대한 인식】
그 해에 머리카락이 빠졌는데, 원폭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세상은 떠들지는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도 아무런 관심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다시 머리가 자랐지만,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은 거울을 볼 때마다 놀랐습니다. 갑자기 빠졌는지, 점점 빠졌는지, 하지만 젊었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습니다. 다시 머리카락이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걱정이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것】
매년 8월 15일, 종전기념일이 돌아옵니다만, 제가 교장선생님께, '원폭의 체험담을 말해도 괜찮을까요'라고 물으면, 안 된다고 했었던 것이, 1980년 전후입니다. 제자들과 젊은 사람들을 전쟁에 절대로 보내서는 안되는 것, 그것이 원폭의 참상을 본 저의 신념입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제자들과 젊은 사람들에게 같은 실패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지만, 저는 자주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곧 죽음이기에, 절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저희는 점점 나이를 먹어가는데, 이제 태어날 사람, 젊은이들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가르침을 정말 열심히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정치라는 것이 엮이게 되면서,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심정입니다. 전쟁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은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습니다.



번역: 임 산경  번역감수: 가와무라 유키
번역 코디네이터: NET-GTAS (Network of Translators for the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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