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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아키라(NAKAMURA Akira) 
성별 남성  피폭 시 연령 14세 
촬영일 2006년9월30일  촬영 당시 연령 75세 
피폭지 나가사키(직접피폭 원폭 낙하 중심지와의 거리:1.2km) 
피폭 장소 나가사키시 모리마치 
피폭 시 직업 등 학생 
피폭 시 소속  
소속관 국립히로시마 원폭사망자추도평화기념관 
한국어 녹음/자막 자막 



 나카무라 아키라 씨 당시 14세. 미츠비시 제강(주)나가사키 제강소에서 근무하던 중, 폭심지에서 1.2km 떨어진 모리마치에서 피폭. 주위를 온통 분홍색으로 물들인 섬광에 놀라, 공장 밖으로 뛰쳐나가다가 폭풍으로 인해 쓰러진 철골에 깔렸습니다. 꼼짝할 수 없는 상태로, 밤새 계속된 폭격 때문에 죽음을 각오했었습니다. 겨우 도착한 집에서 본 것은, 너무나도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정서가 풍부하고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섞인 거리입니다. 항구가 보이는 언덕이고 매우 넓은 곳에 저희 집이 있어, 언덕 아래를 바라보며 즐겁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주로 밭일을 하시고, 아버지는 마을에서 경방단의 임원을 하고 계셨는데, 비상시 마을의 식량 공급을 위해 가마솥을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53세셨습니다. 건강하셨고, 사람들로부터 호감 받으셨으며, 동네를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셨습니다. 아이인 저희들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부모님께 효도하고,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습니다.
 
저는 미츠비시 제강(주)나가사키 제강소의 양성을 위한 기술학교에 입학했었습니다. 그때가 14살입니다. 일주일 중 3일은 공장, 3일은 학교에 갔습니다.
 
8월 9일
그날 11시에는, 제가 가장 어린 사람이었기 때문에,공장의 직원 300명분의 도시락을 가지러 가려고 모여있었는데, 그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분홍색, 산과 모든 것들이 분홍색이었습니다. 분홍색으로 되고 지구가 갈라지는 듯하다고 할까, 산이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북쪽의 중심지를 향해 도망갔었습니다. 폭탄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제가 있던  공장이 직접 공격을 받은 줄 알고 공장 밖으로 도망친 것이었습니다. 중심지를 향해 10m 정도 달린 것 같습니다. 훅하고 날아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철골 밑에 깔렸고, 의식을 찾은 것은 날이 질 무렵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건 '도와주세요'하고 외치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람 살려'하고 외치고 또 외쳤을 때 도와주러 온 사람이 있었습니다. 반장님이었습니다. 11시 2분에 원자폭탄이 떨어졌고, 그 사람은 살아남아서 계속 저를 찾았던 것입니다. 제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름은 혼다 구마오라고 합니다만, 혼다 씨가 저를 구하러 와주었습니다.
 
등에 업혔을 때, 심한 통증을 느꼈습니다. 오른쪽 다리의 대퇴부를 골절 했습니다. '혼다 씨 저는 여기서 죽어도 되니까 여기 두세요. 공장 밖으로 나갈 힘이 없어요.' '여기서 그냥 내려주세요' 하고 울부짖었습니다.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혼다 씨는 '안돼'라고 하며 저를 공장에서 꺼내주었습니다. 혼다 씨는 '집이 걱정되니 일단 집에 가봐야겠다. 너는 여기에 있으렴'하고 말했습니다. 그를 기다렸지만, 노을이 지고 어두워져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점점 어두워지고,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주위는 학교도 집들도 모두 타버려서, 얼굴 위에 불똥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저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불똥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누워있기만 했습니다. 그곳에 그러먼 함재기가 와서 총을 발사했고, 조명탄과 소이탄을 떨어뜨렸습니다. 그것이 밤새도록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죽을지 이제나 저제나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하룻밤이었습니다.
 
형의 도움
혼다 씨는 그 후,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혼다 씨의 집은 나가사키역의 바로 위에 있는 니시자카마치였습니다. 돌아가지 못하고 우라카미가와(강)를 건넜던 것이 다음 날 아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나카무라 씨 있습니까?' 하고 큰 소리로 외쳤더니, 마침 저희 형도 집에 가지 못하고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만났던 것입니다. '나카무라 씨 있습니까?' 하자, '제가 나카무라입니다' 하고 형이 대답했고 미츠비시 제강(주)나가사키 제강소, 나카무라 아키라를 아는가'하고 묻자 형이 '우리 동생입니다'라고 하여 혼다 씨와 함께 아침에, 저를 구하러 와 주었습니다. 그때의 그 순간은 어떻게 표현을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날 수 있다는 그 기쁨과 감격이 벅차올랐던 것 같습니다.
 
들것에 실려서 구호소에 갔습니다. 공장에서 거리로 나가자 우라카미지구는 집 한 채도 남아있지 않았고 연기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인적은 드물었고, 화상을 입어 피부가 늘어진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국민학교 구호소로 갔습니다만, 2km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이미 그곳은 사람들로 가득하여 소독약만 있고, 붕대도 없고 아무것도 없고, 그저 가기만 한 것이었습니다. 의사도 없고, 군의로 보이는 사람이 2명 있었지만 어떤 처치도 없었고, 도무지 어찌할 수가 없는 것 같아서 다시 들것에 실려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니와타니 유타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방공호에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었습니다. 시마바라시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헤어진 후 3일 뒤, 제가 방공호에 누워 있을 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직도 살아 있다면 더 많은 일을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하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가족의 죽음
집에 와보니 집은 전부 타버려서 없어졌었습니다. 그곳에는 어머니가 농업을 하셨기에 비상시를 대비해서 보리를 항아리에 넣어 묻어두었는데, 그로 인한 연기가 한두 군데 나오고 있었습니다. 방공호에 가보니 어머니가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아버지는 화상을 입으셨고 방공호에 누워계셨습니다. 전신 화상으로, 화상을 입지 않은 곳은 모자를 썼던 부분으로, 곧 돌아가실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는 화상 하시고 저는 부상하고, 그리고 누나인 스마코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안절부절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집에 돌아온 그날 밤에 아버지는 돌아가셨습니다. 다음날,  집에서 어머니와 형과 여동생이 아버지의 시신을 태워 보내드렸습니다. 저는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방공호에 남아 있었습니다. 가족들이 아버지를 불에 태워 보내드렸지만, 그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었습니다. 큰 화상을 입은 사람을 다시 태워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친이 얼마나 슬프고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불을 지펴야 했는지를 생각하면 정말 괴롭습니다. 고통을 참아내며 자식이 부모에게 불을 지피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쟁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니.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누나는 20살이고, 미츠비시 중공업(주)나가사키 병기제작소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미츠비시 중공업(주)나가사키 병기제작소는 이비노쿠치마치와 오오하시 공장의 2곳에 위치하며, 매일 사무 연락을 위해 전차를 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형은 아버지를 보내드린 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구호소와 학교, 나가사키현의 여러 구호소를 찾아다녔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포기는 했었습니다. 형은 더는 찾을 수 없었기에 미츠비시 중공업(주)나가사키 병기제작소에서 1구만 남고 아무도 거둬들이지 않았던 유골을 받아 왔습니다. 비록 육친이 아니더라도 이 유골로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누나도 보답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땅에 묻었습니다. 전쟁은 정말로 괴롭고 슬프고, 싫은 경험을 하게 합니다.
 
어머니는 9월 18일에 돌아가셨습니다. 원폭이 있고서 딱 한 달 하고 일주일 만입니다. 돌아가시기 3, 4일 전에 전신에 반점이 생기셨습니다. 저는 들것 위에서 누워있었고 어머니는 그 옆에 누워계셨습니다. 방공호에서의 생활은, 비가 오면 물이 차기 때문에 형은 임시로 지붕을 끈으로 묶어 오두막처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곳에 다다미를 3장 주워서 깔고, 누워있었습니다만 어머니는 급격히 쇠약해지셔서 쓰러지셨습니다. 온몸에 검은 반점이 나타나고 하혈을 하셔서, 형이 3일 밤낮으로 잠도 자지 않고 간호를 했지만, 18일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형과 저, 여동생을 머리맡으로 부르시고는, 앞으로 저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형에게는 결혼하도록, 저에게는 양친의 출신인 사가현의 우레시노 해군병원에 입원해서 치료하도록, 여동생은 친척 집으로 가도록. 그리고 제사는 사가현 우레시노에서, 방공호에서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흰 설탕을 써서 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어기찬 어머님이셨습니다. 분명하게 말씀하시고는 아침에 돌아가셨습니다. 형은 다시 목재를 주워 모아 어머니를 태워 보내드렸습니다. 화장했지만 유골을 담을 함조차 없었습니다. 깨져있던 사발 같은 것에 유골을 담을 수밖에 없는, 이런 비참한 일이 또 있을까요. 유골을 모실 곳조차 없었습니다.
 
후유증
수술로 다리의 골절을 치료하려고 했지만, 당시 원폭의 후유증으로 백혈구 수치가 550까지 내려갔었습니다. 수술하기 위해 칼을 대니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을 수도 있기에 백혈구가 늘어날 때까지 수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나가사키에 돌아와서 백혈구가 늘어난  2, 3년 후에 수술하려 했지만, 이미 근육이 굳어있어서 수술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의 의학이라면 치료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체장애인으로 제 다리는 한쪽이 5cm 짧습니다.
 
새로운 곳을 찾아서
나가사키에 살면, 선배와 후배, 친구들이 어느새 생각납니다만, 우리는 나가사키에 동급생이 없습니다. 원폭으로 인해 모두 죽었기 때문에 동창회도 없습니다. 그런 나가사키에 살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친구의 도움이 있어야 살아갑니다. 친한 친구와 이웃의 사랑과 정을 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이죠. 친구도 아는 사람도 없는 나가사키에는 살 수 없다고, 젊었을 때는 새로운 곳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전하고 싶은 것
오늘날의 전쟁은 규모가 크고, 핵전쟁으로 인해 어느 쪽이 아닌 모두가 망할 수 있어, 서로 노려보는 전쟁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핵의 무서움을 국가 전체의 교육 과목으로 받아들여,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얼마나 쓸쓸한지. 살아남아도 평생 불안해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 무서움을 교과서를 통해 가르친다면, 전쟁은 없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들의 교육이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평화는 얻은 것이며, 젊은이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여 항구적인 평화를 이어가겠다는 뜻을 품어줬으면 합니다. 교육을 받아달라고,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번역: 임산경
번역감수: 가와무라 유키
번역코디네이터: NET-GTAS(Network of Translators for Globalization of the Testimonies of Atomic Bomb Surviv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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